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이순신의 파직 === '''편지가 오고 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던 시대이므로 사건의 전후관계에 유의. 조선 조정 중심으로 정리.''' [[http://journal.knst.kr/xml/28818/28818.pdf|참고문헌]] 12월 27일, 조선 조정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보고가 올라왔다. 12월 12일에 부산왜영에 큰 불을 내 가옥 1천호, 화약창고 2개, 군량 2만6천섬, 왜선 20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선조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다음날, 제찰사 이원익의 선전관인 김신국이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군관 정희현이 부산왜영을 기습한 공인데, 이순신의 군관이 물건 운반으로 부산에 도착해 이를 파악해 전달했고,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는 매우 격노했고, [[류성룡]]조차 이순신을 '게을러진 것'이라 평했다. 1월 1일, 조선 조정에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보고가 올라왔다. 12월 1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편지를 전했으며, "[[가토 기요마사]]의 7천 군사가 12월 4일 대마도에 도착했다. 바람에 따라 거제/기장/서생포 중에 상륙할 것이다. '''조선 수군을 거제도로 옮겨만 두어도'''[* 물론 이 말만 믿고 내해의 요새 한산도의 통제영을 외해에 드러나 있는 거제도 옥포에 배치하고 하염없이 일본군 상륙을 기다리는 것은 바보짓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첫 승리자 조선의 첫 승리인 [[옥포 해전]]이 정확히 이렇게 거제 외해의 옥포에 정박중인 [[토도 타카토라]]의 선박들을 습격해 몰살시킨 전투다.] 상륙에 압박을 주어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태합]]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이 거짓이 되어 오만함이 벌받게 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나 고니시가) 조선 정부와 계속 협상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고니시와 가토는 [[센고쿠 시대]]부터 원수지간인 것이 조선 일본 양국에 이미 유명했다. 고니시 입장에선 가토가 죽는 것도 이득이었고, 안 죽더라도 상륙을 못 해 벌 받게 돼서 이득이었다. 반대로 가토가 상륙해서 이순신이 벌을 받아도 이득이니, 고니시 입장에선 100% 이익만 보는 장사였다.] 1월 2일 [[비변사]] 회의를 통해 선조는 [[이순신]]에게 명령하기로 결정하고, 1월 3일 새벽에 명령서 전령이 출발했다. 1월 6일, 명령서가 한산도로 왔을 때, 이순신은 부재중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공무로 여수에 있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 남해도에 정박해 있었다. 명령서는 늦어도 1월 10일 이전에 이순신에게 도착했고, 이순신은 답변으로 "신이 수군을 뽑아 거느리고 부산 근처로 나아가 주둔해서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일사의 결전을 벌여 하늘에 사무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만일 지휘할 일이 있거든 다시 알려주십시오"라 했고, 조정에 이 편지가 도달하자 모두 장하게 여겼다.[* 1596년 10월 ~ 1597년 3월 [[난중일기]]가 없다(!). 선조수정실록의 1597년 1월 중 날짜가 미정인 부분에 이런 답변내용이 있다. 장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1월 23일 이순신 책임론이 불거지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1월 12~14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410척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재상륙했다. 이를 [[정유재란]]의 시작으로 보곤 한다. 1월 14일, 도원수 [[권율]]이 (이 때까진 가토가 넘어온 사실까진 모른 채) 다시금 한산도를 직접 찾아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응하지 않았다. 1월 19일, 조선 조정에 [[김응서]]의 장계가 올라왔다. 1월 1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나 고니시는 가토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 그가 며칠 내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다. 제발 수전에 능한 조선 수군이 가토를 해상에서 없애달라. 조선의 원수도 갚고 고니시의 마음도 좋으리라"라고 대놓고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주었다는 것. 선조/조정은 이순신에게 공격을 명령한다. 1월 21일, 조선 조정에 도체찰사 우의정 [[이원익]]의 '1월 12~14일, '''일본군 재상륙'''' 보고가 도착했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 조정에 [[원균]]의 "내가 삼도수군통제사였으면 가토를 잡고 일본군 재상륙을 막았다"는 보고가 도착했다'''.[* 애당초 요시라의 '며칠 내'라는 구체적 정보는 11일이었고, 가토의 상륙은 12~14일이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산도에서 가덕도~다대포까지 나아가는데 3일은 걸리므로. 게다가 속도가 빠른 일본 선박을 평저선 중심의 조선 수군은 잡긴 어렵고 상륙만 저지하고 대마도로 돌려보내는 데에 그친다. 즉 이 보고는 무리한 모함이었다.] 1월 23일, 조선 조정에 [[김응서]]의 보고가 도착했다. 1월 13일에 [[요시라]]가 "가토가 이미 도착했다. 어째서 조선 수군이 그냥 놔두었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이 출정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이제 끝났다"고 극언하며 격노했고, '''이 날부터 이순신 책임론이 불거진다'''. 1월 27일,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탄핵을 논의했다. 원균을 전라병사에서 경상도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은 유지시키기로 했다. 2월 1일, 조선 조정에 [[이순신]]의 보고가 도착했다. 1월 19일 선조의 출정명령에 대한 답변서로,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이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출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타이밍이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어, [[사헌부]]는 통제사 이순신을 법률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마침내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의 압송명령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